8월의 끝자락에 시작했던 작업이었다. 여러 가지 일이 겹치면서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휴식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휴식에도 종류가 있는데 아무 것도 하지 않는 휴식과 무언가에 집중하는 휴식이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휴식은 나에게는 쉽지 않다. 온갖 생각들이 떠올라서 좀처럼 쉬어지지가 않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일로 도망가는 편인데, 다행히 나의 일은 그 작업 자체로 저절로 집중이 되는 일이라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마음에 휴식의 이미지를 그리면서 고르게 된 것들은 모두 초록이었다. 짙은 초록과 덜 짙은 초록, 빛 바랜 초록과 푸른색을 손에 쥐었다 놓기를 반복했었다. 나에게 위빙이 다른 아트웍과 다르게 다가오는 것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우선적으로 색이 먼저 다가온다는 점이다. 보통 그림을 그리거나 뭔가를 만들 때 나는 형태를 먼저 떠올리고 그 위에 색을 입히는 일이 많다. 그러나 위빙은 오롯이 색을 먼저 고르고 직물을 짜나가면서 선과 형태가 만들어진다. 그래서인지 위빙을 할 때는 온전히 색에 먼저 집중하게 된다. 실을 집어들고 1분이고 2분이고 그 색을 바라보고 그 색이 펼쳐질 공간을 상상한다. 그러면서 알게 되는 것은 내가 어떤 색은 어느 정도의 크기로 쓸 수 있고, 어떤 색은 아주 작은 면적으로 밖에 쓸 수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가령 초록색은 어른 손바닥 만하게 써도 그 공간을 감당해 낼 수 있지만, 핑크는 엄지손가락 정도의 크기 정도만 감당해 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내가 사용하는 색과 사용하지 못하는 색, 더 나아가 나로써 표현할 수 있는 색과 색에 내가 먹혀버리는 부분들을 세심하게 발견하게 된다. 이것이 요 근래 내 작업의 내용들이다. 초록의 실들을 손에 쥐고 하나하나 짜나가면서 나는 꽤나 큰 위안을 얻었었다. 그리고 내가 짜나가고 있는 초록의 너머에서 오래 전에 묵혀두었던 것들을 다시 만나게 된다. 그것은 기억일 때도 있고 오래 전에 떠올렸던 생각일 때도 있으며 상상했던 이미지들일 때도 있다. 그것들은 구체의 형태를 띄지 않고 몇몇의 도형과 선과 색으로만 구분지어져서 표현되는데, 재미있는 것은 그 이미지를 타인도 비슷하게 느낀다는 것이다. 매번 그렇지만 이번 작업도 꽤나 오랜 시간을 붙들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크게 세 등분으로 이미지의 변화가 있다. 작업을 완성한 후에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놀랍게도 내가 떠올렸던 이미지들과 비슷한 이미지들을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이런 경험은 생각보다 꽤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지인 분께 이 이야기를 했더니 칸트를 인용하며 상호 주관성이라는 말을 해주셨다. 이미지는 공감이라는 말도 해주셨는데, 듣고 보니 맞는 말이다. 이미지는 이해의 영역이 아니라 공감의 영역이겠다. 아침 저녁으로 찬바람이 불기 시작할 무렵 작업은 완성되었다. 완성된 작업물을 틀에서 빼어내지 못하고 또 며칠을 보냈다. 개인적으로 이 순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긴장감있게 걸려있던 직물에서 느껴지던 생동감이 틀에서 분리되는 순간 혼이 빠져버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번 작업을 완료할 때 살아있던 직물을 죽이는 것 같은 상실감을 맛보게 된다. 그렇게 며칠 텅 비어버린 틀을 쳐다보다가 다시 새로운 색을 떠올리고 이미지를 상상해낸다. 어제까지 없던 것을 만들어보려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다시 틀 앞에 앉아서 색을 고르고 한참을 바라보며 색으로 채워질 텅 빈 공간을 상상하면서 세심하게 작은 움직임들을 포착해 내기 시작한다. 그렇게 내 작업의 바퀴는 느릿느릿 굴러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