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빙을 업으로 하면서 부터는 콘텐츠를 개발해야한다는 부담을 가지고 산다. 그리고 그 콘텐츠는 대부분 용도 혹은 쓸모가 무엇이냐에 집중되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위빙이 아직 사람들에게 낯설기도 하고, 뜨개질 하면 목도리를 떠올리듯 위빙을 이용한 대표적인 무엇인가를 떠올리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도구는 무엇을 만드느냐에 그 목적이 있기 때문에 이런 질문은 아마도 도구 그 자체의 속성에 대한 궁금증일 것으로 이해된다.여하튼 그런 위빙을 업으로 하다보니 매번 콘텐츠 개발은 어떤 용도와 목적으로 만들 것이냐라는 질문이 항상 뒤따르게 마련이다. 그것은 즐겁고 재미있는 작업이기도 하지만 종종 거기에 묶여버린 나를 발견하기도 한다. 생각이 용도에만 머물게 되면 위빙 본래의 성격 자체를 잃어버리고 헤매는 일이 잦아진다. 위빙은 선으로 면을 만드는 작업이다. 거기에는 어떤 의도도 용도도 없다. 면으로 완성된 것을 어떤 용도로 사용할 것이냐 하는 것은 그 다음의 고민이다. 용도가 물러난 자리에는 선을 면으로 만드는 위빙 본래의 속성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그러면 나는 그 속성에 충실하여 즉흥적으로 작업을 시작한다. 마음 내키는 대로 적당한 폭으로 날실을 걸고, 다양한 컬러를 손에 쥐어가면서 이것이 지금 나에게 맞는 색인지 아닌지를 가늠한다. 오로지 기준은 '지금의 나'에 있을 뿐이다. 씨실을 통과시킬 때도 전체를 통과시킬지, 절반만 통과시킬지, 혹은 1/3 만 통과시킬지도 그때 그때의 '나'에 맞춰서 진행된다. 그렇게 내리 몇시간을 집중하면서 완성된 직물은 그 때 그 때의 나를 담아내고 있을 때가 많다. 그것을 예쁘다, 혹은 예쁘지 않다라고 스스로는 잘 판단하지 못한다. 여기는 왜 이렇게 했을까, 여기는 왜 이런 색과 이런 색을 만나게 했을까 라고 하는 질문도 불필요하다.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작업을 하는 동안에 의식적으로 의도를 생각했느냐 안했느냐 정도가 되겠다. 의식적인 의도라고 한다면 예쁘게 짜야지, 어디서 본 이미지가 있다면 그것을 모티브로 해봐야지 하는 그런 것들인데, 중요한 것은 결과물은 나의 그런 의도와는 늘 상관이 없다는 사실이다. 예쁘게 짜야지 한다고 예쁘게 짜여지는 것이 아니고, 어떤 모티브를 표현해야지 해서 그 모티브가 잘 표현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완성된 직물을 나의 상태를 확인하는 척도로 볼 것인지, 의도가 표현되지 않은 실패작으로 볼 것인지는 작업자의 삶의 태도와 관련이 있다. 나는 어느쪽이냐하면 양쪽을 오락가락하는 사람 정도 되겠다. 그래서 용도와 쓸모에서 벗어난 작업을 하다보면 말로는 설명되지 못하는 나라고 하는 것을 조금은 만나는 기분이 든다. 그리고 그것을 어떤 언어로 해석하고 이름 붙이느냐에 따라서 나는 이런 사람이 되기도 했다가 저런 사람이 되기도 한다. 확실함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세계.나눠서 분명해지기를 좋아하는 나에게 위빙 작업은 삶의 다른 모습이고, 그래서 공부이며 불확실함 속의 쉼과 같다. 유튜브 ziium official 에서 작업 과정을 확인하실 수 있어요.